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사산 왕조 (문단 편집) == 정치 == [[파일:external/www.kavehfarrokh.com/Court-of-Khosrow-II-7-century-AD.jpg]] 사산 왕조의 정치체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산 왕조 이전 이란을 지배했던 아르사케스 왕조 [[파르티아]] 제국의 통치체제를 간단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였던 과거의 [[아케메네스 왕조]]나 동시대의 [[로마 제국]]과는 달리, 아르사케스 왕조는 [[중세]] [[서유럽]] 국가들과 훨씬 유사한 통치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하나의 왕조와 국호 아래에 있지만 실상은 반독립적인 봉건영주들이 제국 각지에 독자적인 영지와 세력을 구축하고 할거하는 것이다.[* 심지어 봉건영주들이 왕의 칭호를 쓰는 것조차 허용될 정도였다.] 아르사케스 가문은 제국 전체를 직접 지배하는 주인이 아니라, 여러 영주들 중 가장 강력하고 유서깊으며 권위있는 가문으로서 명목상의 군주일 뿐이었다. 로마에 대한 지속적인 패배로 인해 그들의 권위와 실력이 크게 실추된 것이 사산 왕조의 등장 배경임은 앞서 역사 부분에서 설명한 대로다. 이처럼 '취약한' 아르사케스 왕조와 반대로 사산 왕조는 '강력한' 중앙정부의 모델을 내세웠다. 아르다시르 1세 시대부터 이미 황제를 정점으로 하는 관료제를 구축하는 한편, 황실 구성원을 분봉왕으로 삼아 지방 통제를 강화려는 시도가 나타난다. 이는 자원의 효과적인 집중과 활용을 가능하게 했고, 영역 크기만 보면 아르사케스 왕조와 거의 다를 게 없던 사산 왕조가 동로마를 상대로 훨씬 공격적이고 효과적인 전쟁을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 '강한 중앙정부' 모델은 수백년 동안 중앙과 지방에서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이해관계와 정면 충돌하는 일이었으며, 황실이 가진 군사력도 한계가 있었기에 이들을 모조리 뿌리뽑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따라서 사산 왕조의 국가적 역량은 황제 개인의 능력과 카리스마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형태가 될 수밖에 없었으며, 위에서 설명한 사산 왕조의 역사가 상당 부분 황제와 귀족들 사이의 투쟁으로 점철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의 개혁 역시 이 같은 관점에서 보면 자연스럽다. 황제가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바로 귀족들에게 제거당하는 상황에서 강한 중앙정부란 사상누각에 불과하므로, 귀족들의 힘을 줄이고 그만큼 중앙정부를 강화시키는 것은 꼭 필요한 작업이다. 마침 제국에 닥친 미증유의 위기와 마즈다크교의 준동이 개혁을 위한 적절한 환경을 제공했고,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개혁의 핵심은 조세 방식, 그중 특히 지세에 관한 것이었다. 기존 방식은 매년 정부의 징세관들이 각 지역에 파견되어 소출을 파악하고 현물로 거두는 방식이었다. 따라서 실제로 세금을 거두기 전에는 예산을 함부로 편성할 수 없었고, 대귀족들이 넓은 땅을 가지고 있어 황제에게 군사력을 제공하거나 고위관료로 복무하는 대신 독자적인 조세 권한을 가지는 등 비효율과 착취가 쉽게 발생할 수 있는 구조였다. 일반 평민들은 이에 더해 화폐로 인두세까지 납부해야 했다. 그런데 마즈다크교가 선동한 대규모 폭동 때문에 많은 귀족들이 죽거나 쫓겨났고, 오랜 기근과 약탈로 농토가 황폐해져 조세 제도를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필요성이 생겼다. 카바드 1세와 호스로 1세 휘하의 관료들은 매년 수확량을 확인하던 기존 방식을 버리고, 대신 명시적인 토지 대장을 만들어 소유주, 지목, 생산량 등을 기록한 뒤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액수의 세금을 화폐로 납부하도록 했다. 이를 통해 대귀족들의 면세 세습 토지가 늘어나는 것을 최대한 억제하고 정부의 조세 수입을 늘리며, 그 양을 예측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재정의 효율성을 늘리겠다는 취지였다. 세금을 정액화함으로써 발생하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판관(주로 지역 사제) 주재 하에 지목, 생산량 등을 조정할 수 있게 했고, 인두세의 대상 역시 20세 이상 50세 이하로 제한되었다. 이 개혁이 과연 봉건 대귀족들의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한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후대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정복했을 때 발견한 엄청난 양의 화폐를 보면 최소한 "국가 재정의 효율화"라는 목표는 달성된 것이 확실하다.[* 638년 아랍인들이 크테시폰을 함락시켰을 때, 노획한 [[은화]]의 양은 무려 90억 개나 되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산 왕조가 누렸던 경제적 풍요가 어마어마했음을 보여주는 사례.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나라들》/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51쪽] 그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데흐건'(Dehgan 혹은 Deqhan) 계급의 대두이다. 데흐건은 소규모 토지 보유자를 가리키는 말로 원래 그리 중요하지 않은 하급귀족 분류였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조세 개혁과 토지대장 작성으로 많은 평민 혹은 하급귀족 토지 보유자들이 생겨났고, 중앙정부로부터 토지 소유권을 인정받은 이들은 지방 향촌에서 정부의 행정 집행(주로 징세)을 직접 담당하거나 보조하면서 새로운 계급 집단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처음부터 독자적인 영지를 가진 봉건귀족들과 달리 이들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통제를 대행하는 것이었으므로 데흐건의 대두는 단기적으로 중앙정부의 강화에 기여했다. 단 정부의 적절한 관리가 없을 경우 그대로 지역에 뿌리를 내린 데흐건들이 사실상 봉건귀족들과 다를 바 없어지게 되는 문제가 있었는데, 실제로 사산 왕조 말기에 그런 현상이 나타났다. 이런 데흐건들은 이란의 황실과 정부, 대귀족 세력들이 아랍인들의 공세에 모두 무너져 사라진 뒤에도 아랍 정부 치하에서 지역의 관리자로써 상당수 잔존할 수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